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문단 편집) === 승리, 그리고 확산 === ||[[파일:external/www.transparency-korea.org/KimGu-Hyochang-201207-09-e1413523961312.jpg|width=300]]|| > No=36 > 1894년 5월 31일, 동경/벤쿠버 경유 > 조선에서의 혁명 > > <동학혁명에 대한 보고문서> > > 존경하는 백작 각하, > 조선에서 혁명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동학이라고 불리는 반란의 당파는 그 수와 영향력을 점점 늘려가고 있으며, 가장 우려되는 바이겠습니다만, 주민의 공감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거론되는 폭도들의 수는 4천에서 일만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이달 1일 봉기자들은 서울의 정부가 이들을 진압하려 파견한 군대를 패배시켰습니다. 수도의 관리들과 친정부파들 사이에는 아연실색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왜냐하면 이 혁명의 목표가 현 정부의 전복이며 우선은 막강한 민씨 가문의 전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문은 왕을 지배하고 있으며 모든 관식과 고관직들을 그들의 권력 안에 쥐고 있지요. <중략> 그들은 백성들에게 잘해주고 있으며 여하한 폭력행위도 삼가 하는 대신 정부에 속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 철저히 약탈합니다. 동학의 강령에는 외국인 추방이라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다분히 협박을 위한 코미디에 불과합니다. > 삼가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맺습니다. > > 주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 하인리히 폰 쿠덴호베칼레르기 백작 > ------- > - 1894년 5월 31일, 주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공사관에서 본국 외무부에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하여 보낸 보고서. 조선 조정은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로 [[이용태(1854)|이용태]]를 파견했으나 이 인선이 '''대실패'''였다. 이용태는 조정에서 백성을 달래고자 내려보냈던 안핵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다 난리를 일으키는 동학 교도들의 잘못이다.'''"라는 어이없는 이유를 들어 조정과 동학민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동학 교도들을 체포하거나 재산을 빼앗고 마을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은 물론 아녀자들까지 겁탈을 일삼았으며 마을 주변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물론 그냥 데모 수준을 넘어 유혈 사태로 번진 민란이었던 만큼 정부는 슬쩍 넘기기 쉽지 않았던 사태였긴 했지만, 하다못해 '''일반적인 민란의 뒤처리 수준'''[* 수괴급은 사형. 그 외 주동자급 및 중죄를 저지른 게 밝혀진 사람은 귀양. 나머지 단순 가담자들은 훈방 또는 무죄. 임술민란 때도 대부분 이 정도로 처리되었다.] 정도로만 일을 처리했더라도 대책 없이 사태가 커지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임술민란 때도 유계춘 같은 주모자들이 여럿 참수되었지만, 그 때문에 사태가 대책 없이 커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임술민란 이후에도 민란이 계속 이어진 건 정부에서 삼정의 문란을 고치겠다고 약속해 놓고 입 씻거나 실효성 없는 정책만 내놓았고, 수령들과 지방 사족들의 가렴주구가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이용태의 행위[* 이용태는 민란을 우려하여 만류하는 신임 군수 박원명까지 협박해 가면서 농민 봉기의 주모자와 참여자를 색출해 냈고, '''이렇게 그가 색출해내었던 농민은 모두 동학 교도라고 규정'''한 뒤, '''동학 교도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집을 불태운 뒤 교도들과 [[연좌제]]를 적용하여 교도들의 처자식까지 잡아서 살육'''하였다. 교도들의 재산 또한 강제로 몰수했다. 아무리 [[연좌제]]가 용인되던 당시의 사회 풍조라도 이 정도면 고을 하나가 사라질 만한 일가족 몰살에 줄초상까지 벌어질 정도로 참담한 만행이었다. 거기에 동학 교도가 아니던 단순 가담자들을 역시 모두 동학 교도로 단정하여 그들 역시 죽였으니,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다.]에 고부 백성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전봉준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형인 태인 접주 [[김개남]]과 고부 민란 때 포섭에 실패했던 무장 접주 [[손화중]]을 포섭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1차 동학 농민 봉기이다.[* 이상이 자생적 고부 민란이 확대되었다는 견해에 입각한 서술이며 또한 정설이나, 전봉준이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지낸 바가 있어 서로가 안면이 있었고, 1893년 11월 작성된 사발통문에 전주성 점령 및 [[한양]]으로의 진격이 명시된 데 비추어 보아 대원군이 발단에 개입한 계획적 거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모병 과정에서 강조하였으며, 대원군 또한 난 발발 이전부터 동학의 지속적인 청원을 이용해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고, 또 다른 농민군 지도자였던 손화중도 대원군과 그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